3/23/2009

현대사론

** 현대사론


-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.

- 고(古)·중(中)·근(近)이라는 개념 속에는 이미 직선적 시간(Linear Time)의 사관이 들어있다.

- 역사는 반드시 고대·중세·근대로 나뉘어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.

- 고(노예제), 중(봉건제), 근(자본제) <- 맑스의 사관

- 경제사관(經濟史觀) : 경제발전의 역사를 단계적으로 체계화하는 이론. 칼 맑스는 역사를 생산력(productive forces)과 생산관계(relations of production)의 모순으로 인한 단계적 변화로서 파악하였다.

- 서구적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엿보이지 않으면 근대라는 말을 못쓴다. 그래서 한국의 역사가들은 억지로 조선왕조후기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찾으려고 노력했다.

- 근대성(Modernity)의 철학적 규정이 없이 근대사(Modern Age)를 운운할 수 없다. 더구나 근대가 서양역사에 의해 독점될 수는 없는 것이다.

- 한국전쟁(Korean War)은 남침이냐 북침이냐 하는 따위의 물음으로 접근되어서는 안된다.

- 해방(解放, Liberation) : 풀 해(解), 놓일 방(放). 일제 강점에서 풀려났다.

- 독립(獨立, Independence) : 홀로 독(獨), 설 립(立). 온전한 몸으로 홀로 선다.

- 우리는 아직도 독립운동사의 흐름 속에 있다. 독립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.

- O.S.S.(Office of Strategic Services) : 미국내 전략사무국. 전쟁종료를 앞두고 마지막 특수작전을 위해 한국인과 미군을 함께 훈련시켰다.

- 동북항일연군(東北抗日聯軍) : 중국공산당이 동북3성에 만든 항일세력의 연합전선. 그러나 그 부대편성은 실제적으로 조선인들로 이루어졌다. 조선인이 동북항일연군의 주력이었다.

- 모택동(毛澤東)은 1934년 9월부터 2만 5천 리의 장정(長征, Long March) 끝에 1935년 10월 섬서성(陝西省) 연안(延安)에 도착하여 홍군(紅軍) 본부를 구축하였다.

- 조선의용군(朝鮮義勇軍) : 약산 김원봉(金元鳳)이 1938년 창설한 조선의용대로부터 출발하여 연안에서 개편된 팔로군(八路軍)의 전위부대. 주로 선전공작을 많이 하였다.

- 광복군(光復軍) :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(重慶)에서 1940년에 창설한 부대. 장개석의 지원을 받았다.

- 국공내전 :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5년 일본항복 전까지는 국공합작을 하다가 항복후에는 서로 정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내전(內戰)을 벌였다.

- 서안사변(西安事變) : 1936년 12월 국민당 동북방면군 사령관 장학량(張學良)이 장개석을 서안에 가두어버린 사건. 이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. 주은래(周恩來) 주선.

- 중국 대륙이 통일된 상태에서 우리가 8·15해방을 맞았다면 우리나라가 분단될 가능성은 희박했다. 중국의 영향력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. 그러나 중국은 국공내전으로 한국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고, 한국은 미·소진주의 국면을 맞게 된다.

- 건국준비위원회(약칭 건준 建準) : 1945. 8. 15. 당일, 전년에 결성된 건국동맹을 바탕으로 결성된 주체적 조직. 80만 일본인의 안전과 재산보호, 10만 일본군대의 철수를 보장하고 행정권을 넘겨받음. 여운형(呂運亨)이 주축.

- 인민위원회(人民委員會) : 해방직후부터 전국 각지에 조직된 민중자치기구. 지방조직으로 출발, 1945년 8월말에는 이미 전국 145개소에 이르는 인민위원회가 결성됨. 인민위원회야말로 해방후 역사를 이해하는 관건이다.

- 미군정에 의한 인민위원회의 괴멸작전이 6·25전쟁의 주요 기원이었다. 그 내전상황이 확대되어간 것이다.

- 김일성은 인민위원회를 세력기반으로 잘 활용했다. 그것을 소비에트 자치기구와 같은 성격의 조직으로 파악한 것이다.

- 4·3제주민중항쟁 :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한 제주 인민위원회의 저항. 서북청년단의 무차별 학살로 확대, 10만여 명의 무고한 인민이 도륙됨. 제주도는 시다(시多)·혈다(血多)·누다(淚多)의 3다도로 바뀜.

- 행방후 미·소분단시기에 대륙에서 활약하던 독립투사들도 남·북으로 갈리어 입국하게 되었다. 광복군은 남한으로,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군 투사들은 북한으로 들어갔다.

- 1948년부터 1950년 가을에 걸쳐 중국에서 싸운 한국인부대들이 북한으로 입국한 숫자는 10만여 명에 이른다.

- 6·25전쟁은 순수한 동족상잔(同族相殘)의 비극이었다. 그것은 미·소강대국의 꼭두각시놀음을 운운하기 이전에 남·북한 권력자들의 탐욕에 의한 비극이었다.

- 1950. 4. 10 김일성·박헌영·스탈린 모스크바회담

- 1950. 5. 13 김일성·박헌영·모택동 북경회담

- 휴전이란 전쟁중인데 잠깐 쉬고 있다는 뜻이다. 휴전협정조인에 이승만정권은 참가하지 않았다. 종전을 상징하는 평화협정이 없는 한 한국은 전쟁중이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