3/21/2009

율곡의 삶과 생각

** 율곡의 삶과 생각


- 『도덕감정론』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: 아담 스미스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저작. 경제현상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논함.

- 신사임당(申師任當, 1504 ~ 1551) : 시·서·화에 능하였던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예술가. 본관은 평산(平山). 명화(命和)의 딸.

- 율곡의 학문은 김장생, 송시열 등 서인(西人)들에게 계승되었고 그것은 한국 주자학의 정통주의가 되었다. 그러나 율곡의 학문세계는 모든 이단을 포섭하는 너그러움과 스케일감이 있다.

- 퇴계와 율곡이 만나는 역사적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었다. 율곡은 퇴계의 학문을 공경하였고, 퇴계는 율곡을 후생가외(後生可畏)라 하여 그의 학문수준을 높게 평가하였다.

- 율곡사상의 핵심에는 수기치인(修己治人)이라는 유학의 근본사상이 있다. 그리고 시대에 적합치 못한 가치는 끊임없이 변혁되어야 한다는 변법(變法)사상이 있다.

- 수기(修己) : 자기를 다스린다 (to cultivate Self)

- 치인(治人) : 타인을 다스린다 (to govern Others)

- 율곡은 31세부터 49세 죽을때까지 수기치인을 실천했다. 이 시기에 『격몽요결』『성학집요』『동호문답』『학교모범』『사서언해』『소학집주』『만언봉사』『경연일기』등 찬란한 저술을 계속하였다.

- 율곡은 31세때 이조좌랑이 된다. 그리고 이듬해 6월에 명종이 승하하고 15살의 선조가 등극한다. 그러니까 율곡의 벼슬길 세월은 죽을때까지 모두 선조와 같이 한 셈이다.

- 선조는 율곡을 항상 곁에 두려했다. 그러나 율곡의 주요한 정책건의는 실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. 그 냉가슴이 결국 율곡을 일찍 죽게 만들었다.

- 율곡이 죽은 8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.

- 격물치지(格物致知) : 『대학』의 사상. 사물을 바르게 탐구하여 참다운 지식에 이르게 된다. 격군심(格君心)이란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만든다는 뜻이다.

- 청조정(淸朝廷) : 조정을 맑게한다. 청(淸)은 숙청한다는 뜻은 아니다. 조정의 대신들이 당파나 사리사욕을 떠나 대의를 실현케 만든다는 뜻이다. 동·서분당으로 당쟁이 시작되는 시기였다.

- 입관기(立官紀) = 행정 : 관료세계(bureaucracy)의 기강을 세운다. 군기(軍紀)를 바로잡는다는 뜻도 있다.

- 고번병(固藩屛) = 국방 : 국경의 수비를 견고하게 한다. 국방을 튼튼하게 한다.

- 고민생(顧民生) = 경제 : 일반백성의 경제생활을 윤택하게 만든다.

- 다섯가지 율곡이 소임으로 삼는 사명감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격군심(格君心)이었다. 왕의 마음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잡힐 길이 없었다.

- 선조(宣祖)는 머리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국가대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실천력(氣)과 의지(立志)가 박약했다.

- 율곡은 기(氣)가 충천한 인간이었다. 그래서 그의 철학도 생동하는 주기론(主氣論)적 우주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.

- 선조의 시가 비관적이었다는 것은 그에게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심지가 부족했다는 것을 증명한다. 슬픈 명군(名君)은 없다.

- 우유부단(優柔不斷) : 어물어물 걱정만 하면서 막상 중요한 결정은 못내린다.

-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성은 결단력이다.

- 47세(1582) 7월, 3번 사양끝에 병조판서(국방부장관)가 됨. 율곡은 끝까지 국방문제를 건의하면서 눈물속에 죽어갔다.

- 1583년 2월 『시무육조』(時務六條)를 계진(啓陳)함.

- 용군(庸君) : 변변치 못한 임금. 임금의 자겸어.

- 『시무육조』를 계진한 다음해 1584년 정월 16일 서울 인사동 집에서 서거하였다. 선조는 "슬피 통곡하고 육식을 못 올리게 하고 조회를 3일간 철폐하였다"

- 율곡(栗谷)은 『송강가사』의 주인공 정철(鄭澈)등과의 교분으로 서인으로 간주되었지만, 결코 그는 동·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탕평의 인물이었다.

- 당쟁은 단순히 파벌싸움으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. 제한된 관직을 중심으로 귀족세력들이 상호견제하면서 상호공존하는 정치적 매커니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.

- 조선왕조의 비극은 붕당정치가 의회와 같은 제도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세도정치로 몰락했다는데 있다.

- 중쇠기(中衰期) : 율곡이 자신의 시대를 평가한 말. 『경연일기』등에 보임.


* 율곡의 역사관

1) 創業(창업) : Creation

2) 守成(수성) : Maintenance

3) 更張(경장) : Renovation

- 십만양병설(十萬養兵設) : 율곡이 10년넘지 못하여 토붕와해(土崩瓦解)의 환(患)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여, 도성에 2만, 8도에 1만씩 8만의 상비군을 특설할 것을 말함.

- 예견은 적중하였고, 9년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. 당시 서애 유성룡(柳成龍)과 같은 충신도 십만양병을 거부하는 발언을 하였고 왜란을 당하여 뒤늦게 후회하고 이순신을 지원하기에 이른다.

- 왕안석(王安石, 1021 ~ 1086) : 북송 신종(神宗)의 정치고문으로서 신법(新法)의 개혁정치를 편 위대한 정치가.

- 『정관정요』(貞觀政要) : 당나라 태종이 군신들과 토론한 내용을 그대로 적은 책. 그 내용이 엄청 솔직하고 비권위주의적이다.

- 『본조백년무사차』(本朝百年無事箚) : 왕안석의 차자(箚子). 송나라 백년동안 무사한 것을 밝힘.

-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의 책임을 지고 망했어야 한다. 그것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. 전주이씨 왕조가 망하는 것이었을 뿐이다.

- 흔히 실학(實學)이라고 말하는 사조는 우리나라 근대의 맹아로 볼 수 없다. 그것은 조선왕조 유학전통 자체내의 약간의 인식의 변화였을 뿐이다.

- 조선왕조 유학전통내에서 근대를 찾는 노력은 픽션을 쫓는 유희일 뿐이다. 우리는 근원적으로 서구적 근대(Modernity)를 우리역사속에서 확립해야 할 이유가 없다.

- 경제학(economics)은 마샬(A. Marshall)의 한계효용설 이후로 너무 수량적·계량적 학문으로만 발전하였다. 더구나 경제학이 가치중립적인 과학이 될 수는 없다. "제도"라는 표현으로 요약되는 일체의 환경적 조건을 여건(data)으로만 취급하는 모델이론들은 비인간적이며 경국제세의 학문이 아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