9/14/2009

성균(成均)의 이념과 논어

** 성균(成均)의 이념과 논어


-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: 궁정동 안가의 만찬회에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사살.

- 1979년 12월 12일 : 전두환 보안사령관,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.

- 1980년 5월 15일 : 서울의 봄. 10만여 명의 대학생, 서울역 광장을 메우다.

- 1980년 5월 17일 : 계엄확대, 계엄군 대학진주. 휴교령. 김대중 체포.

- 1980년 5월 18일 : 전남대학교 정문 앞 학생 200여 명과 접수 계엄군과의 충돌.

-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까지 박영순양과 이경희양이 토해내는 애절한 호소는 죽음같은 정적이 깔린 심야의 광주시 전역에 메아리쳤다. 73만 광주시민 모두가 이 목소리를 들었다. (시민 여러분,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.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.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.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것입니다. 시민 여러분,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.)

-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하느님,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, 희생하겠습니다. 하느님, 나는 무엇입니까? 너무 가냘픈 존재올시다.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올시다. 주님,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. 더 큰 고통과 번뇌와 시련을 듬뿍 주셔서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. 고아라면 모두 이를 갈겠지요. 사회가 버린 부랑아입니다. 하느님, 어찌해야 좋겠습니까? 양심이 그 무엇입니까? 왜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십니까? 하느님, 도와 주소서…… 모든 것 용서하시고 세상에는 관용과 사랑을…… - 박용준

-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.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,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.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.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. 자,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! -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『1980年代 民主化運動 광주 민중항쟁자료집』

- 去人欲存天理 :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. - 주자학의 제1명제

- 탕평비(蕩平碑) : 영주18년(1742), 당파를 초월하는 마음자세를 성균관 유생들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영조 자신이 친필로 쓴 비석.

- 식년시(式年試) : 전국적으로 3년마다 (갑자에 子·卯·年·酉글자가 들어가는 해의 3·4월) 열리는 정규적 과거시험.

- 문과(文科) : 문관을 뽑는 시험

- 무과(武科) : 무관을 뽑는 시험

- 잡과(雜科) : 기술직을 뽑는 시험

- 소과(小科) : 초시(初試) -> 복시(覆試)

- 대과(大科) : 초시(初試) -> 복시(覆試) -> 전시(殿試)

- 대과(大科)의 초시. 동당삼장(東堂三場)

- 초장(初場) : 경학(經學)

- 중장(中場) : 시·부·표(詩·賦·表)

- 종장(終場) : 시무책(時務策)

- 소과(小科)의 종류 : 1) 생원과(生員科) : 사서의(四書疑)·오경의(五經疑) 철학시험 2) 진사과(進士科) : 시(詩)·부(賦)의 문학시험

- 생원시와 진사시는 다른 날 보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두 시험에 다 응시할 수도 있었다. 이율곡은 13세에 두 시험 다 합격했다.

- 성균관은 기나긴 과거시험 과정중의 한 단계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이다. 소과 복시를 거친 생원·진사래야 입학할 자격이 있었다. 정원은 200명. 성균관의 장은 대제학(大提學)이었다.

- 성균관 재생들은 물론 매일 명륜당(明倫堂)에서 공부하고 또 주기적으로 시험을 보았다.

- 그러나 학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루 두끼 진사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이었다. 아침·저녁을 다 먹고 정간(井間)의 도기(到記, 출석부)에 화압(花押)을 찍으면 원점(圓点) 1점을 얻었다. 조석 중 한번이라도 결석하면 평점으로 하여 계산해 주지 않았다. 원점 300점을 얻어야 비로소 대과 초시 자격을 얻는다.

- 소과초시 -> 소과 복시 --(성균관 원점 300점)--> 대과 초시

- 비천당(丕闡堂) :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하여 과거시험을 보던 곳. 지금 주차장으로 쓰이는 이곳이 바로 장막 둘러치고 유생들이 시험을 보던 과장이다. 성균관 유적은 더 엄숙하게 잘 보관되어야 마땅하다.

- 전시(殿試) : 대과 복시에서 뽑힌 33人의 등급을 매기기 위하여, 임금이 친림하여 전정(殿庭)에서 보는 시험. 여기에서 뽑힌 갑과 3인을 장원(壯元)·방안(榜眼)·탐화(探花)라 불렀다.

- 트리니티 칼리지(Trinity College) : 13세기부터 발전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한 칼리지. 1546년 헨리8세가 세움. 물리학자 뉴톤도 여기서 공부했다.

- 칼리지의 생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식당 출입이다. 반드시 넥타이 정장을 해야하며 엄격한 예식이 있다. 칼리지는 우리나라 단과대학의 개념이 아니며, 전통적 서원에 더 가깝다.

- 서양의 대학들은 중세기 승려교육기관으로 12세기부터 발전하였다. 우리의 대학은 사대부관료를 길러내기 위하여 그보다 일찍 10세기부터 발전하였던 것이다.

- 고려 성종11년(992) 國子監 -> 國學(1275) -> 成均監(1298) -> 成均館(1308) -> 國子監(1356) -> 成均館(1362)

- 오늘 현재의 성균관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1398년이지만, 그것은 단순한 이전에 불과하며, 그 역사는 고려 성종 11년, 992년을 출발로 삼아야 마땅하다. 성균관대학의 역사는 올해로 1010주년이 된다.

-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대학은 고려대학교이다. 대한제국 내장원경(內藏院卿) 이용익(李容翊)이 세운 보성전문학교가 어느 미션 스쿨보다도 더 빠르다. 1905년 5월 설립.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4월에 세워졌으며, 이화학당 대학과는 1910년 4월에 세워졌다. 1910년 이전의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이 세운 황화방(皇華坊)의 역사는 이화여고의 역사일 뿐이다.

- 우리나라 대학의 역사는 외국 선교사교육 중심의 개념으로부터 탈피되어 다시 새롭게 쓰여야 한다. 우리나라에도 소르본느나 옥스퍼드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체 교육제도를 지니고 있었다. 20세기 교육의 공백은 제도적 단절이기 보다는 우리의식의 단절이다.

- 이상설(李相卨, 1871 ~ 1917) : 독립운동가. 호는 보재. 고종31년 문과급제. 성균관 교수 겸 관장으로서 성균관을 신학제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(1895).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(1907). 러시아에서 활약하다가 니콜리스크에서 죽음.

- 국대안(國大案) : 1946년 6월 19일 미군정청이 경성대학과 서울에 흩어져 있던 경성의학전문·치과전문·법학전문·경제전문·광산전문·고등공업·고등상업·사범학교·여자사범학교·수원농림전문 등을 무차별하게 통합하여 하나의 국립서울대학교로 만들겠다고 발표한 국립대학안.

- 해리 앤스테드(Harry B. Ansted) : 미군정청의 육군대위로서 경성대학 학장, 서울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냄. 전혀 대학총장의 자격이 없는, 한국사정에 무지한 인물이었다.

- 1922년 이상재(李商在)가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거국적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이자, 일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(1923.5.).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초대총장으로 취임.

- 국대안 반대운동은 비록 좌익에 의하여 악용된 측면이 있으나, 그 운동에 가담한 학생들의 반대명분은 매우 정당하며 또 그 정신사적 의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.

- 성균관을 국립대학의 주체로 삼았더라면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의 역사는 천여년의 전통을 가진 위대한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.

- 김창숙(金昌淑, 1879 ~ 1962) : 의성 김씨. 경북 성주출신. 호는 심산(心山). 절개가 곧은 선비로 20세기 조선유림을 리드한 거장. 1946년 유도회 총본부위원장·성균관장으로서 성균관대학을 설립.

- 나석주(羅錫疇, 1892 ~ 1926) : 황해도 재령출신.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. 의열단 입단. 조선식산은행·동양척식주식회사의 폭파를 시도하고 장렬하게 순국. 이 나석주 거사를 지시한 사람이 바로 중국에서 활약하던 심산 김창숙이었다.

- 심산은 1927년 상해 공동조계의 공제병원(共濟病院)에서 체포되어 부산을 거쳐 대구로 압송. 나석주 사건과 관련하여 600여 명의 유림이 체포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 발발.

- 나는 대한(大韓)사람으로 침략자 일제의 법률을 부인한다. 일본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(大義)에 모순되는 일이다. 나는 포로다.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.

- 김용무(金用茂)·손치은(孫致殷)·김완섭(金完燮)의 무료변호 간청을 거부하고 공소마저 포기. 14년형 받음. 대전형무소로 이감 복역.

- 1951년,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발표. 부산형무소에 투옥.

- 1952년, 국제구락부 사건을 의장으로 주도, 다시 투옥.

- 1956년, 이승만 대통령 3선취임 반대 경고문 발표. 성대 총장직 사임.

- 심산은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인간해방과 인간평등사상을 고취받았다. 그는 유교의 형식주의(formalism)를 시종일관 혐오하였다.

- 위패매안(位牌埋安)운동 : 1949년 심산이 주도하여 133位 중 5성, 10철, 송조 6현, 아국 18현을 제외한 중국의 94현의 위패를 땅에 묻어버림. 전국유림대회의 결정. 이것은 유교주체운동의 혁명적 사건이었다.

- 경학원(經學院) : 1911년 일제는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없애고, 춘추 2회의 문묘제향만을 담당하는 어용기관으로 만들었다. 그리고 황국신민의 충효를 강조하는 황도유학(皇道儒學)의 소굴을 만들었다. 명륜학원(1930)·명륜전문학원(1939)·명륜연성소(1944)가 모두 황도유학의 그릇된 전통의 산물이다.

- 보수 황도유학자들의 음해에 시달리어 총장직을 사임하고 집 한칸이 없이 여관을 전전하다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뜨다. 향년 84세.

- 벽옹 : 다리 못쓰는 늙은이라는 뜻. 대전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자신을 부르게 된 별호.

- 심산은 1944년 혁명동지들의 비밀결사인 건국동맹(建國同盟)의 남한책임자로 추대되었다. 중앙책은 여운형, 북부책은 조만식. 이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어 왜관(倭館)에서 해방을 맞이함.

- 심산상(心山賞) : 성균관대학교 교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심산사상연구회에서 학술과 실천을 겸비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권위있는 상. 김수환추기경수상. 장회익(서울대 물리학과 교수)수상.

- 周制의 大學으로 五學이 있었다. : 중앙에 벽옹, 남쪽에 성균, 북쪽에 상상, 동쪽에 동서, 서쪽에 고종

= anarchist(아나키스트) : 무정부주의자(無政府主義者)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