5/11/2009

조선경국전

** 조선경국전


- 혼인청첩장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름을 못 밝힐 하등의 이유가 없다. 부모님은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변치않는 부모님일 뿐이다. 살아있는 청첩인만 따로 밝히면 된다.

- 예(禮)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항상 변하는 것이다.

- 대사구(大司寇) : 추관(秋官). 법무장관에 해당. 공자는 정공 14년(56세)에 노나라의 대사구가 되었다.

- 예(禮)란 묻는(問)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. 예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며, 예가 사람을 구속할 수는 없다.

- dynamic process : 동적 과정. 예는 동적인 과정이다. 예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.

- 좌조우사(左祖右社) : 왕이 앉은 자리 왼쪽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 사직을 둔다. - 주례, 고공기

- 사직단을 사직공원이라 부르는 것은 로마의 성베드로사원을 베드로 공원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. 이것은 일본식민지의 조선얼 말살정책의 악습이 남아있는 폐해다.

- 종묘 : 조상숭배, 수직적, vertical

- 사직 : 국토숭배, 수평적, horizontal

- 社 : 示(신) + 土(땅) : 땅의 신(민간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으뜸가는 신은 땅의 신이었다.)

- 땅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다. 우주 생명이 곧 하느님이다.

- 사(社) : 땅의 신 , 직(稷) : 곡식의 신

- 사직이 최고의 신전이었기에 우리가 나라를 종묘사직이라 부른 것이다. 유교국가의 국교를 말한다면 사직 이상이 없다.

- 로마의 국교 : 기독교 , 조선의 국교 : 사직단

- 임금이나 제후는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. - 맹자

- 맹자는 종교의 최고 신도 인간이 갈아치울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.

- 맹자의 변치(變置)의 논리는 백성(民)은 갈아치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.

- 유교적 합리주의(Confucian Rationalism)는 모든 종교적 권위에 불복하는 민본사상이다.

- 유교는 통치자들이 종교를 빙자하여 백성을 기만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. 유교는 윤리며 교육이며 상식의 합의일 뿐이다.

- 제도적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. 유교는 종교가 아닌 것이 아니라, 모든 종교를 뛰어넘는 상식의 종교다.

- 한국인의 극단적 종교성향에도 불구하고 종교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것은 유교적 합리주의의 상식적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. - 도올

- 칼 맑스 : 계급없는 사회(class-less society) , 정도전 : 종교없는 사회(religion-less society)

- 유교적 합리주의는 과거가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과제상황(perennial theme)이다.

- 구차하다 : 고전한문의 용법인 구차(苟且)에서 온 우리말이다.

- 익(益)은 순(舜)임금의 명 신하였다.

- 지배자의 인(仁)한 마음 = 천지의 생물지심

- 불인(不忍) : 차마 어찌할 수 없는 마음

- 유자입정(孺子入井) : 맹자가 성선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한 예 -> 어린아기가 아무 생각없이 우물로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.

- 순천응인(順天應人) : 조선왕조의 혁명이 무력적 전복이 아니라 합법적 절차에 의한 순리적 과정이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구문

- 공민왕(恭愍王, 1351 ~ 74 재위) : 고려 제31대왕으로서 개혁에 힘썼으나 집권말기에는 실정을 거듭하였고 퇴폐적인 삶을 살다가 불행하게 살해되었다.

- 노국대장공주 : 공민왕의 정비 인덕왕후. 몽골여자. 본명은 보탑실리. 1365년에 애낳다 죽음

- 공민왕은 귀족의 아들들로 구성된 자제위 소속 김홍경, 홍륜 등과 변태적인 난삽한 음행을 일삼았다.

- 익비 한씨는 공민왕의 협박하에 홍륜, 한안에게 강간당하여 아기를 낳았다.

- 익비의 아이를 자기의 자식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그들을 해하려 하자, 내시 최만생, 홍륜 일당이 침전에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살해한다.

- 공민왕의 사당이 조선왕조의 종묘안에 모셔져 있는 것은 조선왕조의 개창이 고려왕조의 선양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. 1392년 공민왕의 부인 정비(定妃) 안씨가 이성계 옹립의 전교를 내렸다.

- 위화도회군(1388) :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러갔던 10만대군을 철수시킨 사건. 이로써 고려왕조 멸망의 대세가 결정되었다.

- 위화도회군의 4대 이유 : 1) 명(明) 대항은 외교적 오판 2) 농번기 3) 왜구침입을 유도 4) 전염병

- 10만 명의 장정들이 부모의 품으로 살아 되돌아왔을 때 백성들은 얼마나 기뻤겠는가! 이성계는 이때 민심을 크게 얻었다. 이성계의 혁명성공은 고려왕조의 실정에 항거한 농민군사의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다. 그것은 일종의 농민봉기이기도 했다.

- 정비 안씨(定妃 安氏) : 죽성군 안극인의 딸. 공민왕이 강간시키려 했지만 자살로 위협하여 몸을 지켰다. 그리고 선양의 전교를 내렸고 조선왕조 개창 후에도 살아남았다.

- 조선왕조의 혁명은 방벌(放伐)이 아닌 선양(禪讓)이었다.

- 정도전·조준·남은 등 50여 명의 대소신료들이 공양왕으로부터 옥새를 받아내어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가 보위에 오를 것을 간청한다.

- 도평의사사(都評議使司) : 고려왕조의 최고 정무기관. 여기서 이성계의 추대를 인준했다.

- 선양 -> 추대 -> 인준 (조선왕조의 혁명)

- 밀려난 자에게는 선양의 명분을, 오르는 자에게는 추대의 형식을.

-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이성계는 옥좌에 앉았다.

- 조선왕조의 성립은 권력의지를 가진 개인의 혁명이 아니라, 사회개혁의 시대적 요구를 실현한 사상가그룹에 의한 집단적 혁명이다.

- 애(愛) : 사랑한다(x), 아낀다(o) => 과거

- 체(體) : 본체적 측면, 용(用) : 기능적 측면

- 조선왕조의 500년 장수(longevity)는 단순히 행운의 결과는 아니다. 그 내면에 장수를 가능케 한 합리적 질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.

-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불교이론 그 자체의 부정이 아니다. 불교를 비판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대는 도래할 수 없었다. 그의 불교비판은 곧 그의 정치혁명이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