王이냐 臣이냐
** 王이냐 臣이냐
- 군자는 홀로 있을 때 반성하고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. - 중용
- 사림(士林) : 현실적 권력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의 전통을 지키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선의 선비
- 선비(士)란 그 사회가 지향하는 도덕성을 구현하는 것으로만 당당히 살아가는 자이다. - 맹자
-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. - 주자학의 제1명제
- 전통유학은 사회철학이 빈곤하다고 비판을 받는다. 그러나 인간의 심성의 도덕성에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원적인 해결책이라고 그들은 믿었다. 이것이 오히려 유학의 생명력이다.
- 공주 우금치(牛金峙)전투 : 1894년 11월초 일본군의 신식장비 앞에 동학 10만 대군이 500명만 살아남았다는 처절한 격전. 갑오동학혁명의 실제적 종료.
- 신권(臣權)정치 :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엘리트 신하집단이 통치의 주체세력이 되는 정치형태
- 이방원(李芳遠)은 중앙집권적 절대왕정(Absolute Monarchy)의 화신이었다.
- 성군 세종의 등장은 오로지 이방원의 피의 숙청과 왕권의 강화 속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.
- 세종·세조 때의 명신들은 대부분 정도전을 신봉한 권근(權近) 밑에서 배출되었다. 따라서 세종·세조 때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도전의 틀대로 갔다.
- 세종과 정조는 고도의 학식을 소유한 성군이었지만 신권에 다시 눌려 당대의 영화스러운 모습을 계승시키는데는 실패한다. 만개하고 스러지는 꽃과도 같았다.
- 조선왕조의 역사는 신권과 왕권의 시소게임이다. - 도올
- 문종(세종의 맏아들)은 세종치세기간 중 8년동안 섭정을 하면서 과로하였다. 등극한 후 병약하여 2년 3개월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.
- 단종 때 정치권력은 김종서·황보인에게 집중된다. 그러면서 또다시 신권(臣權)이 강화된다.
- 조선왕조를 단순한 왕권의 역사로 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. 정도전이 왕권을 제약한 이래로 왕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제도속에 묶여 있었다.
- 세조의 아들은 모두 병약했다. 예종은 등극한 후 1년 2개월만에 죽는다. 사람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인 업보라고 생각했다.
-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. 성종 주변에는 그를 압박하는 권신(clown)들이 비교적 적었다. 그래서 새로운 신진士林들이 많이 진출할 수 있었다.
- 성종(1469 ~ 1494, 25년간 재위)의 치세기간에 조선왕조의 문물제도가 완성되었다.
- <경국대전> <동국여지승람> <동국통감> <삼국사절요> <동문선> <오례의> <악학궤범>이 모두 성종때 편찬되었다.
- 성종은 영남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(金宗直, 1431 ~ 1492)등 젊은 문신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. 임사홍·유자광을 유배시키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주었다.
- 훈구파 : 세조의 찬위를 도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공신집단. 훈구공신(勳舊功臣)
- 개혁세력도 기득권자가 되면 보수세력으로 전락한다.
- 훈구(勳舊) <-> 사림(士林)
- 김종직(金宗直, 1431 ~ 1492) : 경상도 밀양출신의 사림파 거두. 항우가 초(楚)의 의제(義帝)를 폐한 것을 단종애사에 비유, 단종을 조위하는 조의제문(弔義帝文)을 지었다. 이것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.
- 사화(士禍) : 사림이 화를 입는다는 의미. 무오사화만 사초가 발단이었기 때문에 사화(史禍)라고 부른다. 사화는 공신, 외척, 인척세력이 사림을 견제한 사건이다.
- 연산군은 치세초기에는 성종말기에 나타난 퇴폐적 풍조를 바로잡았다.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별시문과로 좋은 인재를 등용하고 여진족을 회유하고 변방을 안정시켰다. <국조보감>을 편찬해 제왕의 귀감이 되도록 했다.
- 연산군시대에 일어난 양대사화가 무오사화(조의제문이 원인)와 갑자사화이다.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윤씨의 사건을 알게 되면서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사건이다. 이때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선생인 김굉필(金宏弼)도 사형당했다.
- 드라마 <대장금> 속의 중종과 장금의 관계는 물론 픽션이다. 그러나 중종이 57세로 세상을 뜨기 직전, 내의원들이 약제를 상의하고 있는데 "내 증세는 여의 장금이 안다"라고 전교하는 결정적 한 줄이 <중종실록>에 실려있다.
- 조광조(趙光祖, 1482 ~ 1519) : 김굉필의 제자로 젊은 나이에 사림파 영수가 되어 발탁된다. 34세에 등용되어 대사헌에 이른다. 기묘사화로 38세에 죽음.
- 조광조는 우리나라를 요순삼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. 이것을 흥지치(興至治)라 불렀다. 지극히 이상적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이다.
- 조광조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평가는 재미있다. 퇴계는 그를 극히 존숭하는 반면, 율곡은 공부가 덜된 상태에서 융통성없는 도덕적 이상만 높고, 현실에 어두운 자로 평가했다.
- 소격서(昭格署) : 궁정내 도교의 제식을 거행하던 관서. 고려때부터 내려왔다. 우물에 비친 북두칠성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. 1518년 조광조가 집요한 읍소 끝에 혁파시켰다.
- 위훈삭제(僞勳削除) : 중종반정을 도모한 공신들의 과장된 공훈을 없애버려야 한다. 76명이나 당했다.
-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당했다가 곧이어 사사된다. 그는 다음과 같은 절명시(絶命詩)를 남겼다. 나는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, 나는 국가를 내집처럼 걱정했다.
- 조광조가 투옥되었을 때 성균관 유생 1천여명이 광화문에 모여 무죄를 호소하였다.
- 이황(李滉, 1501 ~ 1570) : 연산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산 조선중기의 대학자. 주자이후 동아시아 최고의 성리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다.
- 정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의 유학은 이퇴계에 이르러 조선사람들의 내면적 삶의 철학이 되었다.
- 1558년 10월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. 이때 새로 급제한 기대승이 퇴계를 찾아뵈었다. 이퇴계는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다. 평생 손아래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.
- 기대승(奇大升, 1527 ~ 1572) : 퇴계시대의 대학자. 1558년 문과에 급제, 성균관 대사성까지 올랐다. 본관은 행주.
- 기황후(奇皇后) : 기대승과 같은 행주 기씨의 여자인데 궁녀로 원나라에 가서 마지막 황제 순제(順帝)의 황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. 이것을 계기로 기씨는 고려에서도 세력기반을 얻었다.
- 추만(秋巒) 정지운(鄭之雲, 1509 ~ 1561) : 경기도 고양출신의 학자. 조광조 계열인 김정국(金正國), 김안국(安國)의 문하. 퇴계에게도 배웠다. 그의 독창적 작품 <천명도설>은 사칠논쟁의 발단이 됨.
- 전통적 주자학에서는 리(理)는 순선(純善)한 것이기 때문에 이상적 이념일 뿐 구체적 작위(作爲)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.
- 리발(理發)은 주자학에서도 이단적인 생각이다. <주자어류>에도 "리발"이라는 말은 있으나 퇴계의 주장과는 어감이 다르다.
- 단(端, tip) : 본체가 드러난 하나의 단서. 실마리.
- 단(端)은 성(性)이 아니라 심(心)이다.
- 소종래(所從來) : 그 감정의 근원을 캐어들어 간다면...
- 소수서원(紹修書院) :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. 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명종으로부터 편액을 받음. 하바드대학보다 93년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
- 율곡의 철학은 퇴계와는 계통이 다르다. 율곡은 고봉 기대승의 논리를 계승하였다.
- 율곡은 리발(理發)을 인정치 않는다. 기발(氣發)만을 인정한다.
- 리발(理發) -> 이상주의적 인간관
- 기발(氣發) -> 현실주의적 인간관
- 송시열(宋時烈, 1607 ~ 1689) : 호는 우암. 조선후기 기호학파 노론의 영수.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는 기사환국때 죽음.
- 조선후기에 오면 주기계열의 학풍이 퇴계적으로 리화(理化)되는 현상이 생긴다. 그러면서 성리학은 생명력을 잃고 현실감각을 상실했다.